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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마음' 지향한 교회의 나침반…보수·진보 모두에 존경받아

세차게 비바람이 울었다. 그가 하늘로 가는 날 땅에 남은 이들도 바람과 함께 울었다. 2일 오전 8시43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사랑의교회' 옥한흠 원로 목사가 폐암 후유증으로 소천(召天.하늘의 부름을 받음)했다. 72세. 이날 오전 11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선 임종예배가 열렸다. 덕수교회 손인웅 목사는 예배 설교에서 "한국교회의 큰 별이 하나님께로 가셨다.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 목적이다. 옥 목사께선 그 영광의 자리로 가셨다. 그러나 이 땅에 남은 우리들은 그가 그립고 또 그립다"고 말했다. 임종예배에 참석한 50여 명의 교계인사와 교인들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한국 개신교에서 '사랑의교회'는 묵직한 이름이다. 서울 서초동 강남의 요지에 있는 대형교회라서가 아니다. 사랑의교회를 세우고 이끌고 은퇴하는 순간까지 옥 목사가 몸소 보여줬던 목회의 방향 영성의 무게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개혁적 복음주의 진영의 거목이었다. 보수와 진보를 망라해 '가장 존경하는 목사'를 꼽으라면 늘 그의 이름이 올라갔다. 옥 목사는 1938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 영문학과 총신대 신학대학원 미국 켈빈신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에게 제안이 들어왔다. 교인 수 500명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안정적인 목회가 가능한 좋은 기회였다. 옥 목사는 거절했다. 그리고 78년 서울 강남에서 9명의 신도만으로 목회를 시작했다. 당시 교회명은 '강남은평교회'였다. 81년 사랑의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때만 해도 강남은 서울의 중심이 아니었다. 개척 초기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주일 예배를 보는데 작은 키에 볼품없는 여성이 들어왔다. 맨 뒷자리에서 숨다시피 설교를 들었다. 종종 눈물도 흘렸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사라졌다. 매주 그랬다. 옥 목사는 몇 번이나 그 여성을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늘 놓치고 말았다. 한 달 후에야 옥 목사는 간신히 그 여성을 붙들었다. 그리고 주소를 묻고 심방을 약속했다. 찾아갔더니 그녀는 부잣집의 가정부였다. 현관 마루에 걸터앉은 옥 목사는 이혼과 자살기도 오랜 식모살이로 범벅이 된 그녀의 기구하기 짝이 없는 인생담을 들었다. 옥 목사는 교회를 통해 그 여성 교인을 껴안았다. 그 사이에 교인 수는 점점 늘었다. 소문을 듣고 설교를 듣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강남의 부유층과 인텔리도 많았다. 반면 교회를 위해 봉사해 오던 가난한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다. 옥 목사는 소매를 붙들고 매달렸다. "제발 교회를 떠나지 말아 달라"며 눈물로 하소연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교회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몸담기에는 너무 부담스럽다. 목사님도 사랑하고 교회도 사랑한다. 그렇지만 우리 같은 신세가 기댈 만한 교회는 아닌 것 같다"며 떠나갔다. 그들은 주로 파출부거나 셋방살이 노동자 혹은 구멍가게 아줌마들이었다. 식모살이를 하던 그 여성 교인은 꿋꿋하게 교회를 다녔다. 나중에는 집사도 됐다. 그러다 병에 걸려 옥 목사의 집에서 옥 목사의 품에서 세상을 떴다. 옥 목사는 자신의 집에서 삼일장을 치렀다. 옥 목사는 목회 인생을 통틀어 그녀를 "가장 기억에 남는 성도"로 꼽았다. 이 일화는 옥 목사의 영적 지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옥 목사는 처음부터 소외된 이웃 가난한 이웃을 위한 목회를 지향했다. 대형교회들이 세습문제로 시끌시끌했던 2003년 말에는 후임 오정현 목사에게 담임목사직을 넘겼다. 정년을 5년이나 앞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2007년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던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대회'에서 옥 목사는 대표설교를 맡았다. 개신교계 진보와 보수가 한목소리로 그를 추천했다. 고인은 10만 명의 청중을 향해 절규를 쏟아냈다.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복음을 변질시켰다는 주님의 질책 앞에서 자유로운 이가 얼마나 됩니까. '나는 아니오'라고 발을 뺄 수 있는 목회자가 얼마나 됩니까. 거룩하신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이놈이 입만 살아서 회개한 한국 교회의 종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그 절규를 '명설교 중 명설교'로 꼽는다. 고인은 생전에 "은퇴 후 내 목회가 자기모순을 갖고 있지 않았나라는 우려를 했다. 교회를 너무 키워버렸기 때문이다. 교회가 비대해지면 내 교회론에 부합한 교회의 정신을 살리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많은 이가 옥 목사의 소천 앞에서 가슴을 친다. 그가 내밀던 영성의 나침반을 아직도 이 땅은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백성호 기자

2010-09-07

미주서도 애도 물결…10여명 조문단 파견

옥한흠 목사의 소천에 미주 한인 기독교인들 역시 애도를 표하고 있다. 남가주 사랑의 교회는 교역자와 장로들로 구성된 10여명의 조문단을 지난 3일 파견했다. 또 남가주 사랑의 교회를 비롯해 동부 사랑의 교회 넥스트 사랑의 교회 등은 홈페이지에 '고 옥한흠 목사님을 추모하며'라는 제목으로 배너와 함께 옥 목사의 사진을 올려 애도를 표하고 있다. 남가주 기독교교회협의회 회장 지용덕 목사는 "교단과 교파를 떠나서 교계의 어른이요 지도자였고 항상 푸른 상록수 같은 분이셨다"며 "그런 분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라고 아파했다. 남가주 한인 목사회 회장 이정현 목사 역시 "옥한흠 목사님은 한국교회에 큰 영적인 지도자였다 특별히 말씀의 기초에 약했던 한국 교회에 제자훈련의 기초와 방향을 닦은 위대한 말씀의 종이었다"며 "큰 별이 떨어졌다. 우리 한국의 교회에는 큰 슬픔"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한편 고 옥한흠 목사의 빈소가 마련된 한국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지난 2일부터조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방지일.조용기. 박종순.김삼환.길자연.손인웅.이광선.이정익. 이동원.홍정길 목사 등 한국교회의 내로라하는 교계 지도자들이 대거 조문했다. 3일 열린 입관예배에는 장례식장은 물론 사랑의 교회 본당 등에서 4300여명이 참석해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함께 예배를 드렸다. 오수연 기자 [email protected]

2010-09-07

옥한음 목사를 추모하며 "주의 훌륭한 종…영적 유상 영원히 간직될 것"

옥한흠 목사께서 소천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며 한국교회의 또 하나의 큰 지도자를 잃었다는 점에서 마음 중심으로 애석함을 금치 못한다. 작년에는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을 개신교회에서는 김준곤 목사와 정진경 목사를 먼저 떠나 보내면서 아쉬움과 허전함을 금치 못하였으며 금년에도 몇 달전 김의환 목사를 떠나 보내고 이어서 다시 옥한흠 목사를 우리 곁에서 떠나 보내게 될 때 참으로 인생의 무상함을 더욱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도 그의 72년 인생여정에서 보여준 깨끗하고 단정하며 한 사람의 크리스천으로서 목회자로서 보여준 아름답고 멋이 있으며 훌륭한 삶과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된다. 옥 목사께서는 나보다는 두살이 아래인 후배요 교단이 달라서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할 때 식당에서 만나 교제하고 교회행사에서 만나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던 사이였다. 특별히 그의 신앙과 사역 그의 인격과 삶은 내가 늘 부러워하고 칭찬하며 존경할 만한 인간미가 넘치는 주의 훌륭한 종이었다. 그는 항상 예수 제일 복음중심의 신앙과 삶을 살면서 불의나 비복음적인 것과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항상 달콤한 설교만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비판하기도 하였으며 쓴소리도 서슴치 않고 하였다. 금년에도 그가 사랑의 교회에서 행한 설교에서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을 꼬집어 비판하기도 하였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하고 인기와 영합하고 타협하며 달콤하고 왜곡된 진리를 쫓아가는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는 '평신도를 깨운다'는 제자훈련을 통해서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깨우고 건강한 교회로 세우며 성장시켜 보려고 씨름하고 헌신하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양적으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고민할 줄 아는 목회자였다. 바른 교회관을 정립해 보려고 수십년 간 고민하고 씨름하였으며 바른 크리스천의 삶을 살고 실천해 보려고 노력한 것을 그의 여러 글이나 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된 것처럼 그도 그리스도를 본받고 살아가려고 고민하고 씨름한 자였다. 나는 그의 이런 점을 참으로 좋아하고 부러워한다. 오늘 크리스천들과 목회자들은 이러한 거룩한 고민이 너무 없고 자신과 교회와 사회를 향한 애통과 눈물이 너무 메마른 것 같다. 주님은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여인들을 향해 나를 위해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 하지 아니하였던가! 그리고 주님은 돌 위에 돌 하나 놓이지 아니하고 무너질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통곡하지 아니하였는가! 아마 옥한흠 목사께서도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많은 성도들과 사람들을 행하여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 자신과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며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던 옥한흠 목사는 가셨지만 그의 72년간의 인생여정을 통해 보여주신 흠모하고 존경할 만한 인격 신앙 섬김 열정 비전 겸손 사랑 헌신 리더십은 한국교회와 많은 성도들의 가슴 속에 가장 값진 신앙과 영적 유산으로 영원히 간직되리라 믿는다. 성시화운동 미주대표회장

201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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